서울무용센터 2025 입주예술가 성과발표회 비평
조형빈(무용비평)
안무는 근대 이후로 단단하고 고정된 형상으로서의 운동성을 담지하는 기획으로 작동해 왔다. 무용이 하나의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읽고 쓸 수 있는 어떤 매개가 필요했고, 춤을 추고 나면(시간이 흐르고 나면) 사라져 버리는 어떤 것을 붙잡기 위해 ‘안무’라는 개념이 무용의 핵심에 자리하게 되었다. 기획으로서의 안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일종의 정언명령이었는데, 이것은 춤을 구성하고 설계하는 안무의 개념과 맞아떨어짐과 동시에 근대적 이상으로서의 몸, 지치지 않고 영원히 위로 날아오르는 탈인간의 형상을 주조하고 구현하고자 했던 당시 예술의 흐름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멈추지 않는 운동성을 쫓으면서 무용은 그 어떤 예술보다도 시간에 민감한 예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안무는 지금 발현해 과거로 달려가는 움직임을 현재에 붙잡는 ‘쓰기’였고, 동시에 미래에 도래할 춤을 상상하고 잠재시키는 ‘쓰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무는 시간을 붙잡고 예비하는 단단한 형상이 되었다.
권예진은 이러한 단단한 형상으로서의 안무를 두 가지 차원에서 들여다본다. 2025년 서울무용센터 상반기 입주예술가 성과발표회에서 선보인 〈Melting Time〉은 양초가 만들어지고 타는 움직임들을 퍼포먼스의 은유로 차용하여 그 시간성을 가늠하는 동시에, 물질의 형태적 변이를 통해 도래할 미래의 안무를 짐작하게 하는 일종의 실험이었다. 이것은 단단한 고체의 물질성을 지닌 양초가 그것을 태움으로써 흐르는 액체와 잠재성의 양태인 기체를 아우르는 잠재적 형상(혹은 개념)임을 보여주면서, 움직임으로 표현된 몸의 상전이(相轉移)를 통해 근대성 이후를 바라보는 안무의 가능성들을 좇는 리서치이자 그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Melting Time〉이라는 작업이 단순히 물리적 운동성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안무가 본인이 지나온 노동의 경험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점에서, 안무의 근대성에 대한 고민이 물질의 자본화와 교차되는 일종의 사회적 탐구이기도 했다.
〈Melting Time〉은 서울무용센터 스튜디오 블랙의 창문 커튼을 모두 걷은, 환한 배경에서 시작한다. 무대 왼편에는 왁스를 끓이고 있는 냄비가 있고, 그 옆에는 초를 말리기 위한 거치대와 만들어지고 있는 여러 개의 양초들이 있다. 두 명의 무용수는 함께 양초를 제작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번갈아 가며 하나의 심지로 연결된(나중에 잘려 두 개의 양초가 될) 양초를 냄비에 충분히 담갔다가 그것을 빼내어 거치대에 걸고 또 다른 양초를 냄비로 가져가는 작업을 반복한다. 왁스를 데우기 위해 켜져 있는 가스불을 조심하는 것 이외에는 복잡하지 않은 과정이지만, 이렇게 심지를 뜨거운 왁스에 담갔다 빼서 입히는 과정을 대략 50번 정도 반복한 후에야 우리가 인식하는 양초의 형상이 만들어진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결과물로서의 양초는 분명 단단한 고체이지만, 그것은 만들어지는 과정에 이미 액체였으며 그것이 쓸모를 가지기 위해서는 다시 액체, 혹은 기체로 돌아가야만 하는 운명에 놓여있다. 다시 말해, 흐르는 것으로서의 미래 혹은 과거의 운동성이 깃들어 있는 잠재태가 바로 우리가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양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움직임, 혹은 운동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역동이 사실은 시간의 줄기 위에 걸쳐져 있음을 발견한다. 안드레 레페키(André Lepecki)는 근대적 춤의 시간성을 “멜랑콜리”로 표현한 바 있다. 춤 자체가 현전하면서 동시에 부재하는 일종의 상실이므로 거기에서는 멜랑콜리가 발생하며, 안무는 이 근대성의 멜랑콜리한 프로젝트에 화답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기술이었다는 것이다.¹ 안무의 기술은 부재를 현전 안에 고정시키며 이미 떠나버린 것들과 춤추는 순간을 다시 연결시킨다. 만약 잠재태로서의 양초가 운동성이었던 과거(액체)와 운동성으로 바뀔 미래(기체)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순간에 발화하여 사라져 버리고 마는 춤을 붙잡아 두는 ‘단단한 쓰기’로서의 안무와 겹쳐질 수 있다. 〈Melting Time〉은 그렇게 노동의 시간 위에, 퍼포먼스의 잠재적 발화를 겹쳐놓고자 한다.
레페키가 이야기한 근대적인 형상으로서의 안무는 운동성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음에도 ‘단단했다.’ 그것은 ‘멈춰 서기’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주체성을 흔드는 불안정한 멈춤(제롬 벨)이나 식민주의의 수직성을 거부하고 쓰러져 기어가는 몸(윌리엄 포프.L)과 같은 것들이 보여주는 가능성은 이 단단한 운동성이 상상할 수 없었던, 혹은 춤의 근대적 주체성을 훼손하는 균열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이 근대성의 특징을 ‘액체’라고 표현한다. 바우만이 파악하는 근대의 특징은 고체(단단한 근대성)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그가 근대를 액체성으로 묘사하는 것은 근대의 체계 안에서 세습된 고체 덩어리들이 충분히 견고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² 근대성은 그 자체로 끊임없이 위협받을 수밖에 없으며 고체적 형상, 혹은 그 근대적 견고함을 유지하기 위해 가변하는 전략으로써 액체성이 필연적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를 통해 안무를 들여다보면 안무는 결국 운동성을 가진 견고한 고체이면서, 동시에 균열들을 회피하기 위해 액체적 전략을 취한 변화하는 형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에서 레페키가 언급하고 있는 ‘넘어지고’, ‘비틀거리고’, ‘느린’ 존재론의 안무들은 도래할 미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근대적) 안무의 자기생존적 전략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다음에 와야 할 탈근대적 안무의 모습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Melting Time〉의 고체와 액체를 오가는 움직임과 안무에 관한 질문을 씨줄이라고 한다면, 노동에 대한 고민은 그것을 엮어내는 날줄의 역할을 한다. 양초를 만드는 과정은 무용수들이 보여준 것과 같이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수십 번의 반복적인 작업이 필요한, 시간과 노동력이 들어가는 과정이다. 양초라는 고체에 노동의 시간이 담기듯이, 안무라는 (고체적) 형상 역시도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과거의 시간이 담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러한 노동 활동의 과정을 삶의 과정 안에서 반복적으로 생산되고 즉각적으로 소비되는 자연의 일부라고 이야기한다.³ 세계 안에 물질로서 존재하는 모든 인간 노동의 결과물들은 단지 한 순간만 존재하며, (그것은 소비되기 위해 존재하므로) 세계의 다른 어떤 것보다 빨리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물질로서 세계에 응집된 양초(노동의 결과물)는 단단한 몸으로 세계에 현현하지만, 결국 그것이 빛과 열의 형태로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점에서 일시적인 찰나의 안무와도 같은 것이 된다. 아렌트는 노동과 소비가 둘 다 “물질을 파괴하여 게걸스럽게 삼키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하며, 노동이 만들어낸 것은 그 재료가 된 물질을 궁극적으로 파괴하기 위한 준비 단계라고 언급한다.⁴ 결국 노동은 세계에 물질화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남기지만 종국에 그것의 파괴를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에 현현하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퍼포먼스의 수행성과 같은 성질을 띠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