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최/주관한 ‘2025년 지역공연 비평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조형빈(무용비평)

몸과 아닌-몸 사이의 질문들

어두운 무대 위를 드넓게 감싸고 있는 것은 푸른 비닐이다. 금속 제품이 새로 생산되어 그 쓰임새를 시작하기 전까지 표면의 부식을 막기 위해 금속 제품에 도포되곤 하는 바로 그것이다. 보통의 무용 공연의 바닥에 깔리는 댄스 플로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어렴풋이 보면 마치 대양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이질적인 질감이 들어차 있다. 그 생경한 질감 위로 독특한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하나둘 등장한다. 무용수들은 어렴풋한 형상으로 나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가 보통의 의복이라 생각할 수 없는 디자인으로 이루어진 의상을 입고 있다. 살색으로 덮여 마치 인체의 장기나 기관들을 연상시키는 울퉁불퉁하고 얼룩덜룩한 표면의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푸른 비닐 위를 미끄러지듯 걷는다. 주목할 만한 점은 등장하는 무용수 모두가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나 그 비슷한 어떤 형상도 아닌 것처럼, 혹은 그렇게 보이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인간의 몸을 이루는 살덩이처럼 보이지만 인간처럼 걷지 않는,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사이를 오가는 몸들이 비닐 위를 미끄러진다.

김보라의 안무작 〈내가 물에서 본 것〉은 몸과 몸 아닌 것 사이에서 인간의 개념에 대해 다시 질문한다. 무용수의 몸을 덮고 있는 의상은 몸(body)이면서도 몸이 아닌 것(non-body), 다시 말해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유기물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환원된 기관을 과연 ‘몸’이라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이 작품의 이야기가 출발하는 곳이 ‘물질’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작품 내내 이 몸-무용수들이 뭉치고, 흩어지고, 나열되고, 반복되는 형상을 구성함으로써 결국 이 개념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출현시킨다. 몸을 이야기하는 것과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몸과 인간은 등가 교환될 수 있는 개념인가? 몸이 아닌 것으로 인간을 이야기하거나, 인간이 아닌 것으로 몸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푸른 비닐 위에서 유영하듯 뒷걸음질 치는 무용수들이 개념 사이를 넘나들며 던지는 이 질문들은, 몸을 의심함으로써 “비위계적 존재로서의 몸”¹을 말하고자 하는 몸에 대한 포스트휴머니즘적 접근이기도 하다.

뒷걸음질로 등장한 무용수들은 이내 비닐 위로 쓰러져 그것을 뜯어내기 시작한다. 노출되어 있는 무용수들의 손과 발이 비닐과 접촉했을 때, 그리고 비닐을 뜯으면서 비닐과 비닐이 마찰을 일으킬 때 거기에서 불편한 소음들이 발생한다. 어떤 음향 장치도 가동되지 않고 있음에도 무대는 비닐을 찢어내는 소음으로 가득 차고, 몇 겹으로 덮여있는 비닐이 벗겨지면서 아래에 깔려있던 금속 바닥이 모습을 드러낸다. 비닐이 뜯어져 나오면서 발생하는 비릿한 소음과 동시에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질감, 이 감각이 〈내가 물에서 본 것〉 공연 전체를 관통한다. 어떤 날카로운 것이 몸을 관통했을 때 우리가 인식하는 감각들, 내부적(감각이 발생하는 장소가 신체 안이라는 점에서) 혹은 외부적(이물질은 결코 신체와 동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감각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몸을 다시금 인지한다. 장 뤽 낭시(Jean-Luc Nancy)가 자신의 심장 수술 경험을 통해 타자의 침입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구성하게 하는 절대적 타성(alterity)을 소환한다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내가 물에서 본 것〉은 신체의 내외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질적인 감각들을 동원해 몸과 인간 존재를 다시 돌아보고자 시도한다. 따라서 금속판으로 덮여 있는 무대 위를 기괴한 의상의 무용수들이 구르면서 몸이 ‘몸이 아닌 것’으로 느껴지도록 하는 것, 그럼으로써 타자와 자기 신체 사이에서 균열을 내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 이 공연이 보여주고자 하는 서사다.

〈내가 물에서 본 것〉은 안무가가 난임 시술을 경험하면서 맞닥뜨린 몸에 대한 재사유로부터 출발한 작품이다. 아기를 낳는 몸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몸으로 침투하는 몸 외부의 ‘물질’들과, 그에 따라 변화하는 여성의 몸이 여성 스스로의 의지로부터 벗어날 때 출현하는 몸 소외의 국면들이 이 작품의 근간을 이룬다. 여기에는 물질적으로 몸을 바꾸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몸 자체의 변화와 더불어, ‘임신 가능한 몸’이 사회 제도적인 규율 아래에서 가지는 의미와 부딪혔을 때 안무가 본인이 그것에 순응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몸의 정치학까지도 들어있다. 어떤 몸을 특정한 상태로 돌입시키기 위해 몸을 ‘주조하는’ 과정, 그리고 몸이 스스로 고유의 몸이 아닌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연 리플렛에 실린 안무가의 말에 의하면, 안무가는 호르몬 주사의 여러 부작용 중 “전신 무기력함에서 내 몸의 감각 중 촉각에 대한 반응들이 점차 조용해지는 현상이 가장 두려웠다. 내 몸과 내 몸의 맞닿는 느낌, 타인과의 접촉, 내 몸과 공간과의 접촉 등 기존에는 당연했던 반응들이 사라져 가는 두려움은 몸의 변화 중 가장 큰 충격이었다”라고 말한다. 오랜 기간 무용수이자 안무가로 살아왔던 자신에게 몸은 가장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매체로 자리 잡아 왔지만, 그 몸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나아가 자신의 통제를 잃어버리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이를 통해 몸을 다시 돌아봐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물에서 본 것〉은 몸을 물질(matter)로 바라봄으로써, 자아와 주체를 싣고 있는 인간의 매개인 몸 대신 물질 그 자체로서의 몸을 통해 인간 너머를 상상하고자 하는 시도다. 몸을 인간 그 자체가 아닌 사물로 간주할 수 있다면, 의지와 인식이 발화되는 유일한 장소가 아닌 생기가 깃든 물질로 파악할 수 있다면 사물과 인간을 평등한 선상에 놓고 바라보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 지점을 인간의 개념을 해체하는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내가 물에서 본 것〉이 몸을 통해 일으키고자 하는 물의(matter)다.

물(matter)로서의 몸, 포스트휴먼

김보라의 작업은 대부분 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특히 초기작에서 두드러지는 오브제로서의 몸에 대한 탐구는 김보라가 몸을 춤추는 것이 아닌 ‘어떤 다른 것’으로 상상하고자 하는 작업적 호기심의 맥락에 놓여있다. 무용 안에서 몸을 단순히 표현의 수단이나 무대적 장치로 두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을 표상하는 몸이 그 자체로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해 온 것이 김보라의 작업들이었다. 이미 김보라의 초기작에서부터 그는 몸의 형상을 통해 몸을 다른 것으로 상상하거나(〈꼬리언어학〉(2015)), 몸의 부산물을 통해 몸의 교통 불가능성을 표현하는(〈혼잣말〉(2011)) 등 몸이 가지고 있는 표현적 상징들을 해체하여 몸을 다른 것으로 바라보고자 했었다. 김보라에게 있어 몸은 중요한 작업의 매체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끊임없이 의심함으로써 거기로부터 작업을 출발시킬 수 있는 작업의 시작점이었던 것이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내가 물에서 본 것〉은 김보라에게 있어 몸을 전격적으로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경험이자 계기로써 출발한 작업이다. 김보라 스스로가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몸에 대한 강렬하면서도 가혹한 경험이 몸을 하나의 세계로서 간주해 오던 그에게 세계의 테두리를 다시 정의하는 기회가 된 것이다. 그 기회는 임신을 하기 위해 그가 직접 받았던 25회의 난임 시술이었다. 공연의 리플렛에서 김보라는 불임 혹은 난임 여성에게 지원되는 난임 시술 경험을 이야기하는 생생한 경험을 적고 있다.